대한민국에 '걷기 열풍'을 일으키며 제주도의 가치를 새롭게 조명했던 서명숙 사단법인 제주올레 이사장이 2026년 4월 7일, 향년 68세를 일기로 별세했습니다. 고인은 언론인으로서의 치열한 삶을 뒤로하고 고향 제주의 흙길을 일궈 전 국민에게 치유의 길을 선물한 선구자였습니다. 서명숙 이사장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그녀가 남긴 깊은 발자취를 상세히 정리해 드립니다.

서명숙 이사장의 출생과 성장 과정
서명숙 이사장은 1957년 10월 23일, 제주도 서귀포에서 태어났습니다. 함경도 무산 출신의 아버지와 제주도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자라난 그녀는 어린 시절부터 제주의 푸른 바다와 돌담 사이를 뛰어놀며 고향에 대한 깊은 애착을 가졌습니다. 그녀의 학창 시절은 서귀포초등학교, 서귀포여자중학교를 거쳐 제주시의 신성여자고등학교로 이어졌으며 이후 서울로 상경하여 고려대학교 교육학과를 졸업했습니다.
그녀의 청년기는 한국 현대사의 격동기와 맞물려 있었습니다. 대학 시절 '영초언니'로 불리던 천영초 선생 등과 교류하며 민주화 운동의 현장을 지켜보았고, 이러한 경험은 훗날 그녀가 언론인으로서 날카로운 필력을 갖추는 데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치열했던 23년의 언론인 생활
대학 졸업 후 서명숙 이사장은 1985년 월간지 '마당'의 기자가 되면서 언론계에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이후 '한국인'을 거쳐 1989년 시사저널 창간 멤버로 참여하며 본격적인 정치부 기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남성 중심의 보수적인 언론 환경 속에서 여성 기자로서 독보적인 존재감을 드러낸 그녀는 '독종'이라 불릴 만큼 열정적으로 현장을 누볐습니다.
그녀의 실력은 곧 성과로 이어졌습니다. 시사주간지 역사상 최초의 여성 편집장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고 이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을 역임하며 한국 언론 지형의 변화를 이끌었습니다. 약 23년 동안 펜 하나로 세상을 비판하고 진실을 보도하며 언론인으로서 최고의 위치에 올랐지만, 치열한 삶의 무게는 점차 그녀의 몸과 마음을 지치게 했습니다.
산티아고에서 찾은 새로운 꿈
나이 쉰이 되던 해, 서명숙 이사장은 돌연 사표를 던지고 홀로 스페인으로 향했습니다. 800km에 달하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36일간 걸으며 그녀는 비로소 자신과 마주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그 길 위에서 그녀는 한 영국인 순례자로부터 "당신의 나라는 이보다 훨씬 아름다운 섬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는 말을 듣고 큰 깨달음을 얻습니다.
가장 화려했던 명성을 뒤로하고 고향 제주의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 돌아온 그녀는 '길을 내는 여자'로 변신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길을 닦는 행위를 넘어, 잊혔던 제주의 옛길을 연결하고 사람들의 마음을 잇는 새로운 문화를 만드는 작업의 시작이었습니다.
제주올레의 탄생과 걷기 열풍
2007년 9월, 서명숙 이사장은 서귀포시 성산읍 시흥초등학교에서 출발하는 제주올레 1코스를 처음으로 세상에 공개했습니다. '올레'는 제주 방언으로 거릿길에서 대문까지 통하는 아주 좁은 골목길을 의미합니다. 그녀는 자동차가 다니는 아스팔트 길이 아닌, 사람이 걷고 숨 쉴 수 있는 흙길과 돌담길을 찾아 하나둘 연결해 나갔습니다.
제주올레는 개장 초기부터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습니다. 속도 중심의 현대 사회에 지친 사람들은 '놀멍 쉬멍(놀며 쉬며)' 걷는 올레길의 철학에 열광했습니다. 이후 2022년 27번째 코스인 추자도 구간까지 개통하며 총 437km에 이르는 거대한 도보 여행길이 완성되었습니다. 제주올레의 성공은 지리산 둘레길 등 전국적인 '걷기 여행' 신드롬을 촉발했고, 제주를 단순한 관광지에서 '치유와 사색의 섬'으로 탈바꿈시켰습니다.
암 투병과 마지막 투혼
서명숙 이사장의 삶은 평탄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올레길을 일구는 과정에서도 건강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2020년 암 투병 끝에 완치 판정을 받으며 다시금 활력을 찾는 듯했으나, 이후 병세가 재발하며 다시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야 했습니다.
그녀는 투병 중에도 "올레길은 나 자신의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운 행복한 종합병원"이라며 길 위에서 얻는 생명력을 강조했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제주올레의 지속 가능성과 환경 보존을 위해 고민했던 그녀는 2026년 4월 7일, 많은 이들의 애도 속에 영면에 들었습니다.
주요 저서와 수상 기록
서명숙 이사장은 탁월한 문장가이기도 했습니다. 그녀가 남긴 저서들은 그녀의 철학과 삶의 궤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습니다.
- 흡연 여성 잔혹사: 여성 기자의 시선으로 본 사회적 편견에 대한 고찰
- 제주올레 여행: 올레길 탄생 비화와 여행 가이드
- 식탐: 제주의 맛과 길 위의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 영초언니: 대학 시절의 인연과 시대의 아픔을 기록한 회고록
- 숨, 나와 마주 서는 순간: 투병 과정과 내면의 평화를 다룬 기록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2009년 관광진흥 유공 대통령 표창, 2011년 교보생명 환경대상, 2013년 한국 최초 아쇼카 펠로우 선정, 2017년 국민훈장 동백장, 2021년 한국여성지도자상 대상 등 수많은 상을 받았습니다.
사회적 공헌과 유산
서명숙 이사장이 남긴 제주올레는 단순한 산책로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닙니다. 그녀는 길을 통해 지역 경제를 활성화했고, 마을 주민들과 여행자가 상생하는 모델을 제시했습니다. 또한 '클린올레' 캠페인을 통해 환경 보호의 중요성을 알렸으며, 일본 규슈올레와 몽골올레 등 해외에도 '올레 브랜드'를 수출하며 한국의 걷기 문화를 세계에 알렸습니다.
그녀의 장례는 고인의 뜻에 따라 제주올레 6코스 소보공원 잔디광장에서 영결식이 엄수되며, 제주의 푸른 자연 속에서 마지막 인사를 나누게 됩니다.
서명숙 이사장은 떠났지만, 그녀가 만든 437km의 길 위에는 오늘도 수많은 사람이 각자의 고민을 안고 걷고 있습니다. "길을 걷다 보면 막혔던 마음이 풀리고 새로운 희망이 보인다"던 그녀의 메시지는 제주를 찾는 모든 여행자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입니다. 고인이 일궈낸 평화로운 길들이 앞으로도 훼손되지 않고 온전히 보존되어 다음 세대에게도 치유의 공간으로 남기를 기원합니다.










